[제182호] 대한민국 산업화와 함께한 나의 반평생(2) /김인호(상학 61학번, 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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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호 명예교수

기업파워이론과 주택은행 장기발전전략을 마련하다


​당시 필자는 한양대 산업경영연구소를 맡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삼성그룹 전략기획본부의 박차장이란 분이 찾아와 무엇이든 하고 싶은 연구를 아무 부담 없이 하라는 재벌 측의 뜻을 전하면서 적지 않은 연구비를 전달해 주고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는“야, 대한민국에 이런 재벌이 다 있구나”하며 산업연구에 몰입할 수 있었고 1990년대 초반에는 그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세계 산업의 주도권 이동원리’와 ‘기업파워(firm power)는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두 권의 저서를 집필하고 한국경제신문사에서 발간하였다.

‘세계 산업주도권의 이동원리’는 당시 삼성 맨 필독서 10권 중 유일한 국내도서로선정되었고, ‘기업파워는 어디에서 오는가?’는 1995년 출판문화대상(전경련 주관)을 받았다. 여기서‘기업파워’라는 개념과 용어는 물리학의 뉴턴운동법칙에서 빌려 온 것으로‘기업이 이익을 창출하는 힘의 능률’로 개념정의하고, 이를 결정하는 요인을 물리학에서 파워를 구성하는 4가지 요소, 즉 (부피*밀도)*가속도*속도에서 유추하여 [(기업규모*(솔루션/제품적합성, 공정적합성)*혁신*성장벡터)]로 접근하여 기업파워 이론을 정립하였다.

필자는 내친 김에 기업파워 이론의 이론적 합리성과 실용성을 국제적으로 확인해 보기 위해 영국 서섹스대학교의 크리스토퍼 프리만 교수를 만나서 많은 의견을 나누며 토론하는 기회를 가졌다. 프리만 교수는 기술과 경제성장과의 관계를 핵심 이슈로 연구하는 신(新) 슘페터리안(Neo-Schumpeterian) 진화경제학의 선두주자로 노벨경제학상 후보자로 거론되곤 했지만 그의 영역이 주류 경제학 분야가 아니다 보니 수상은 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때 그는 기술경제학자로서 국가경제레벨과 산업레벨을 주로 다루다 보니 혁신의 현장인 기업과 사업레벨을 다루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는데, 이에 대해 필자는 기업레벨과 산업레벨을 동시에 다루는 통합성, 그리고 기술혁신과 요구(needs) 진화와의 관계적 합성을 성과의 결정인자로 인식하는 이론적 틀과 자연법칙을 논거로 원용하여 이론을 전개했다. 그러자 그는 이론의 강건함에 있어서 자기는 너무 부족하다고 정직하게 고백하며 필자를 격려해 주던 거목다운 그의 일면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토론이 끝나고 그는 필자에게 런던에서 그곳 학교까지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했느냐고 묻기에 (택시로 약 2시간 소요되며 대중교통수단은 당시 철도가 있었지만 운행회수가 너무 적어 대단히 불편했음) 삼성의 런던 지점에서 차편을 마련해 주었다는 필자의 말을 듣는 순간 놀라며(사실 당시 필자는 삼성그룹사의 사외감사를 맡고 있었음), “당신이 누구인데 삼성이…”하며 필자에 대한 정중함을 내보였다. 그러한 그의 행동에서 그 당시 삼성이 영국에서 어떻게 인지되고 있었는지가 필자에게 확연히 전해져 왔다.

1990년대 초반 정부에서는 국책은행들의 통폐합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한국주택은행(당시 국책은행, 후에 국민은행과 합병)의 과장 한 분이 산업경영연구소로 필자를 찾아와 주택은행의 장기발전전략(안)을 마련하는 연구프로젝트를 수의계약으로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이 연구에서 필자는 세계금융 추세(mega-trend)의 과거 궤적과 전망의 시각에서 한국금융의 미래모습과 주택금융은행의 위상을 재정립하고자 하였다.

세계금융 추세의 관점에서 1984년과 1985년이 필자에게는 특별한 해로 인지되어왔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기 바로 직전인 1944년에 서방국들은 이른바 브레튼우즈협정을 통해 금환본위제도와 고정환율제를 채택하였다. 전쟁복구 수요와 전후 대량생산-대량유통-대량소비로 이어지는 대량경제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체제의 도입으로 한동안 미국이 절대적 강자로 위상이 강화되었지만 뒤이어 패전국인 일본과 독일의 재부상으로 미국 제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자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1971년 금태환을 정지시키고 변동환율제로 전환하였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 제조업분야에서 중국과 아시아 4용(四龍 ; 한국, 대만,홍콩, 싱가폴)이 급부상하면서 미국은 세계 최대채권국에서 단숨에 세계 최대채무국으로 전락했다. 이 때가 바로 1984-1985년인데, 같은 시기에 미소양극체제 또한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에 레이건 정부는 신자유주의의 기치 아래 금융부문에서도 규제완화를 추진하였는데 그것이 미국 금융산업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에 대하여 필자는 궁금증이 대단히 컸었다. 왜냐하면 규제완화 이후 재무분야에서 위험관리라는 미명 하에 금융공학이라는 신(新)용어를 들고 위험을 사고 파는 희한한 돈놀이꾼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파생금융상품을 통해 미국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월가(Wall Street)의 새로운 금융세력으로 등장했는데, 파생금융상품이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제로섬이므로 그 시장을 유지하는 비용만큼 사회에 부담을 주는 네거티브 섬의 해악상품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디지털혁명과 규제완화에 따라 선물, 옵션 등 다양한 파생금융상품이 등장하는 대격변기에 필자가 수행한 주택은행의 전략연구와, 뒤 이은 3여년 간의 주택은행 사외이사로서 필자가 접했던 경험은 실물경제와 금융경제와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하여 심도 있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아니라 세계금융의 주도세력과 그들의 행보에 대해서도 다소나마 눈을 뜨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필자는 1997년 국내에서 터진 IMF 외환위기와 같은 해 미국에서 무역적자의 급증과 파생금융상품의 폭증이 맞물려 발생하는 사태를 지켜 보면서 이런 급변현상들이 이후 한국과 미국과 세계금융시장에 어떤 충격을 줄 것인가라는 물음을 갖게 되었다.

먼저 한국의 경우 IMF 사태 이후 30대 재벌의 반(半)이 사라지는 충격과 더불어 역설적으로 무역흑자가 엄청난 규모로 지속되었다. 또 이 때 살아남은 재벌기업들은 그 후 김대중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까지의 10 년간 반(反)기업정서 속에서도 2008년 미국 발 경제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삼아 한국경제를 대도약시켰다. 이 같은 위업을 보면서 필자는 재벌구조(Chaebol Structure)의 진화논리와 기업의 지속번영 원리를 보다 일반적으로 이해∙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정립하고 싶은 강한 열망을 갖게 되었다.

한편 미국의 경우 2차 오일쇼크(1979)가 터지자 글로벌 규모로 초(超)경쟁상황이 격화되고 여기에 디지털 혁명이 촉발되면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패러다임 이동이 전개되었다. 이에 1980년대 초반 레이건 정부는 이런 환경변화에 적극 적응할 수 있도록 규제완화와 주주가치 극대화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정책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때 미국 기업들은 노사관리와 공급사슬(supply chain) 관리 면에서 리스크(위험)가 큰 제조업을 외면하고, 대신에 비교적 용이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서비스, 유통업이나 금융업으로 전업하는 추세를 보였다. 이런 추세에서 미국은 1985년을 기점으로 세계최대 채권국에서 최대 채무국으로 바뀌게 되었고, 2008년 월 스트리트 붕괴(리만브라더스 사태) 전까지 약 20여 년간, 특히 1997년부터 10여년간 실물경제는 급속히 왜소화되었다. 하지만 같은 기간에 파생금융상품 시장은 급속히 초거대화되는 바람에 실물경제의 왜소화와 금융경제(특히 파생금융)의 초거대화라는 불균형 구조는 물밑에 가려지고 오히려 미국경제가 활황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파생금융상품은 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제로섬이므로 그 시장을 유지하는 비용만큼 결국은 국가경제에 부담을 주기 때문에 파생금융상품 시장이 거대화되면 될수록 실물경제는 점점 더 왜소화되게 된다. 돈이 일단 실물경제로부터 파생금융상품시장으로 들어오면 빠져나가질 않고 계속하여 더 많은 돈을 끌어들이는 블랙홀로 작용하면서 실물경제를 피폐화시키다가 급기야는 2008년 리만브라더스 사태를 일으켰던 것이다. 이 사태는 글로벌 경제위기와 자본주의 자체의 위기로까지 증폭되었는데 단기간에 그치지 않고 아직까지도 물밑에서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필자는 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2008년 사태 몇 개월 전에‘파생상품에 주목하는 이유’란 칼럼을 한국경제신문에 게재하여 파생상품의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었지만 당시 주목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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