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2호] 세기의 보물을 찾아서⑥ 반 고흐가 그린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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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영국 회장 

 

1990년대 말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택배가 하나 도착했다. 관장 앞으로 된 이 택배를 뜯어 보니 액자에 그림이 들어 있었다. 관장을 비롯한 직원들은 이 그림을 보고 일순간 말을 잊은 채 긴장과 흥분에 쌓였다. 한참 동안 놀란 표정으로 그림을 바라보던 관장이“오! 반 고흐여! ‘트라뷔크’의 초상화여!”하고 외치자 다른 직원들도 왁자지껄하며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트라뷔크의 초상화는 1880년대 반 고흐가 그린 그림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도난 신고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 후 몇 십 년이 지난 오늘날 갑자기 누가, 왜, 하필이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보냈는가? 하는 의문에 미술관 관장과 직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는 “자화상”, 특히 “귀가 질린 자화상”을 비롯한 여러 점의 자기 초상화를 남겼지만 다른 사람의 초상화도 많이 그렸다. 그가 초상화를 그린 트라뷔크는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이 사람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델란드 북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미술상에서 점원 노릇도 했고,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공부도 했고, 그래서 전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1880년에는 생각을 바꾸어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브뤼셀 왕립 미술아카데미에서 미술 공부를 했다. 이 미술공부는 화상(畵商)이자 동생인 테오(Teo)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는데, 테오는 당시 유명한 인상파 화가들을 소개하며 필요한 생활비, 주거비 및 그림에 필요한 도구들을 대주면서 형 빈센트를 도왔다. 그러다가 1885년에는 벨기에 북부 뇌넨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유명한 <감자 먹는 사람들>(1885)을 그렸다. 이작품은 어둡고 칙칙한 색조로 농촌 생활상의 진면목을 잘 묘사하고 있었지만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1886년에는 파리로 이주하여 그 곳에서 인상주의 화가들과 신인상주의 화가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동생 테오가 결혼한 후 그와의 다툼과 각박한 파리 생활에 지쳐 1888년 5월 프랑스 남부의 아를(Arles)로 이주했다. 거기서 그는 <정물, 열두 송이의 해바라기가 있는 꽃병>(1888)과 <밤의 카페 테라스>(1888) 같은 유명한 작품들을 남겼다.


아를로 이사한 지 몇 달 후인 1888년 10월에 마침 동료 화가 폴 고갱이 고흐가 사는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 집은 고흐가 그린 ‘노란 집(The Yellow House)’으로 유명하다. 두 화가는 몇 주간 함께 작업을 했으나, 나중에는 사이가 악화되어 급기야 반 고흐가 자신의 귓불을 자르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고갱은 떠나갔고, 고흐는 1889년 5월, 스스로 정신병원에 찾아가 입원했다.
그는 그곳에서 1년 남짓 머물면서 치료를 받았다. 그 와중에도 작품 활동을 계속하여 병원 근처에 있는 작은 숲의 짙은 삼나무와 올리브 나무도 자주 그렸다. 또 이 병원의 경비대장인 샤를 트라뷔크를 알게 되어 그와 그의 부인 잔 트라뷔크의 초상화도 그렸다. 샤를트라뷔크는 1884~85년 마르세유에서 콜레라가 발생했을 때 수많은 환자들을 돌보면서 그들이 죽고 고통 받는 것을 목격한 사람인데, 고흐는“그의 얼굴에 담겨 있는 설명할 수 없는 사색에 감동을 받아서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한다. 이것이 고흐가 트라뷔크 부부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 사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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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는 이 두 초상화를 트라뷔크 부부에게 주었는데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현재 남아 있는 두 초상화는 동생 테오에게 주려고 다시 그린 복제본이다. 이 복제본 초상화도 한 동안 자취를 감췄었는데 최종적으로 나타난 것은 프랑스 파리에 사는 폴 베루지에르에 의해서다. 그는 무대 미술 전문가로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에서 이 초상화를 구입하여 집안에 걸어 두었다. 이 때 액자 뒷면에 장녀 세시리의 이름과 둘째 딸 레오느르의 이름을 각각 써 놓았고, 이 액자들이 걸려 있는 벽을 배경으로 베루지에르 부인과 그 여성 친구의 사진을 찍어두었다. 이 사진과 액자 뒷면의 이름들이 그 후 그림의 주인을 찾는데 아주 귀중한 단서가 되었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치닫고 있을 때 독일군 SS친위대의 소령 로샤가 베로지에르로부터 이 그림들을 돈을 조금 주고 강탈하다시피하여 가져갔다. 나중에 독일 SS친위대는 독일의 패전이 임박해지자 위조신분증을 마련하여 남미 아르헨티나로 망명했다. 이 때 갖고 있던 군자금이 수천만 달러에 달했는데 이 자금을 현금이나 금 덩어리로 반출하려면 너무 부피가 크고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그 자금으로 다이아몬드나 유명 화가의 그림을 사서 짐 가방 속에 넣어 갔던 것이다. 반 고흐의 그림 같은 것은 한 점에 1,000만 달러 이상 가니까 도피자금 운반을 위해서는 아주 편리한방법이 되었을 것이다.


트라뷔크의 초상화를 뺏긴 폴 베루지에르는 체포되었고, 그 후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홀로코스트의 대참사(나치 독일이 수백만명의 유태인을 학살한 사건)때 희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부인과 딸은 암시장에서 위조 신분증을 구해 스페인을 거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이제 이야기는 다시 뉴욕의 메트로포리탄 미술관으로 돌아 온다. 미술관 측에서는 이 초상화의 주인은 누구이며, 어떻게 이 미술관으로 오게 되었는지 고심하다가 경찰에 조사를 의뢰했다. 뉴욕 경찰국 강력반 내에 미술 담당 수사관들이 있는데, 이들은 세계를 주름잡는 공개 미술시장과 살인도 마다 하지 않는 암시장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담당하고 있다. 미술 담당 수사관 중에 ‘크레이’라는 형사가 있었는데 그는 이 그림에 뭔가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있음을 짐작하고 조사를 시작했다. 사건의 원천인 2차대전 말기에 프랑스 파리에 살던 폴 베루지에르와 그의 가족, 또 독일군 SS친위대의 소령 로샤 등의 기록을 조사했다.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 정보당국에서는 유태인 학살로 유명한 SS 친위대 대장 뮤-라 등을 추적하고 있었다. 크레이 형사는 그림이 파리에서 독일군에게 넘어간 경위를 비롯하여 이 그림이 남미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UPS(세계적인 택배회사)편으로 보내진 경위 등을 면밀히 수사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제2차 세계대전 후 SS친위대를 포함한 나치의 고위 관리들이 대거 망명한 곳으로, 그들의 망명길에 많은 유품들을 반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크레이형사는 그 곳에서 트라뷔크 초상화를 발송한 사람의 신원과 그 이유를 확인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이 초상화의 법적인 상속인은 현재 뉴욕시에 살고 있는 여성 교수 레이첼 베루지에르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레이첼 베루지에르가 곧 2차대전 중 SS친위대에게 그림을 빼앗긴 폴 베루지에르의 손녀다. 이 같은 뉴욕 경찰국의 조사 결과가 나오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측은 이 그림을 곧 레이첼 교수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몇 년 전에 이 트라뷔크의 초상화가 암시장에서 일본인 재벌에게 2천만 달러에 팔려 갔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그 그림은 가짜였고, 이와 관련하여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레이첼 교수가 아직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지, 아니면 누구에게 팔았는지, 팔았다면 일본인 재벌이 산 것이 맞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이야기는 다시 반 고흐로 돌아온다.
빈센트 반 고흐는 이듬해인 1889년 1월 7일에 정신병원에서 퇴원했고, 그 해 5월 아를을 떠나 생레미로 이사 갔다. 생레미에서도 고흐는 작품을 계속하여 저 유명한“별이 빛나는 밤”이라든지 사이프러스 나무를 소재로 한 작품 등을 남겼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들 그림에서 고흐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한다. 서양에서 사이프러스 나무는 한번 자르면 다시는 뿌리가 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을 상징하는 나무로 여긴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달 후인 1890년 7월 고흐는 쇠약해진 몸과 정신을 이겨내지 못하고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아우 테오 반 고흐도 정신병이 생겨 6개월 후인 1891년 2월 형의 뒤를 따라갔다. 형제는 나란히 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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