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호] 중국의 패권화와 우리의 대응 / 안태호(5회, 본회 명예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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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중국은 인민공화국이 된 지 73년, 경제개방을 이룬지 43년이 되며, 인구 14억, 국토면적 960, GDP 15 조 달러에 달하는 대국이다. 이 나라는 우 리나라에 접해 있으면서 역사적으로 막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고, 오늘날에는 미국과 패권다툼을 벌이면서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그들의 역사와 패권주의, 그리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생 각해보지않을수없다. 

중국의 근현대사는 대략 중화인민공화국성립 이전과 모택동 시대, 그리고 등소평 이후의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인민공화국 성립 이전 

1600년대 이후 중국은 청조(淸朝)가 다스렸으나 그 말기에는 영국을 비롯한 독일 · 미국 · 프랑스 · 러시아 등 열강들에의한 반(半)식민지 · 반(半)봉건체제의 국가였다. 1840년에 발생한 아편전쟁을 계 기로 외적으로는 영국 등 세계열강에 의한 식민지화가 진행되었고, 내적으로는 청조(淸朝) 지배에 저항하는 혁명운동이 일어나 사실상 존립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중국 대부분의 성(省)들이 독립선언을 했고, 1912년에는 손문(孫文, 쑨원)이 남경에 중화민국을 세웠다. 하지만 남경 을 제외한 지역은 각지에서 군벌들이 난립하고 이들 군벌들은 각기 다른 열강과 손을 잡고 있어 중국은 마침내 분열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다만 이 와중에 손문은 1919년에 중국 국민당을, 그리고 모택동 은 1921년에 중국 공산당을 세웠는데 이 두 당은 대립이 아닌 협력관계에 있었다. 1924년부터 1928년까지 국민당과 공산당은 합작으로 군벌을 타도하고, 중국민족 통일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를 위해 국민당은 소련과 제휴했고, 소련의 지원 을 받는 공산당은 개별적으로 국민당에 가입하기도 했다. 이를 “제1차 국공합작" 이라고 한다 그러나 1925년 손문이 사망 한 후 그 뒤를 이은 장개석(嶈介石, 장제스)은 공산당을 대거 숙청해 들어갔다. 그러자 1931년 모택동은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설립하여 그 후에는 국 · 공 간에 내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937년 중 일전쟁이 발발하자 양측은 그동안의 적대관계를 중단하고 항일통일전선을 형성 하여 일본군에 대항했다. 이를 “제2차 국 공합작"이라고 한다.  

그 후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 중국은 전승국이 되었지만 그 후에는 국민당군과 공산당군 간에 다시 내전이 벌어졌다. 이 내전은 2년여 동안 계속된 끝에 공산군이 승리하여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쫓겨가고 공산당은 1948년 10월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수립했다. 


모택동 시대(1945년~1976년) 

이후 중국은 모택동 시대로 들어선다. 모택동은 구 소련의 사회주의 정책을 그대로 받아들여 토지개혁운동을 전개하고 후에는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토지개혁은 군중을 동원하여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이를 농민들에게 경작 시키는 운동이다. 처음에는 이 토지를 농민들이 집단으로 경작하는 합작사(合作社) 체제를 운영했다가, 1958년에는 전 국 합작사들의 토지를 모두 귀속시켜 인민공사를 설립하고 통일적인 영농을 실시했다. 인민공사는 농업뿐만 아니라 수 산업, 상공업과 교육 및 군사에 이르기까지 확대했고, 또한 농촌뿐만 아니라 그 범위를 도시에까지 확대됨시킴으로써 농공업의 생산력을 크게 증가시키기도 하였다.


이에 힘을 얻은 모택동은 5년 뒤 경제대국인 영국을 추월한다는 비현실적인 목표로 대 약진정책을 세웠다. 그러나 이 정책은 시장원리를 완전히 무시하여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국민부담만을 가중 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농촌 실정을 무시 한 집단 농장화에다 농장에 철공소까지 세워 무계획적인 공업화를 추진한 결과 생산성이 크게 떨어졌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대기근까지 덮쳐 막대한 인명피해가 발생함으로써 대 약진정책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이 때 모택동은 주석을 사임하고 그 후임으로 유소기(劉少奇 류사오치)를 임명 했다. 그러나 유소기가 자기 정책과 상반되는 시장주의를 도입하자 그를 주자파 (徒資派 자본주의자)로 몰아투옥시켜 결국 옥사하고 말았다. 그 후 1966년에 모택동은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사회주의 정책을 계속 추진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택동 일파의 정권탈취 투쟁수단이었다. 이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모택동의 처 강청(장칭)을 중심으로 한 사인방이 전국에 홍위병을 조직하고 자본가, 지주, 학자와 지식인 심지어 일반인까지 숙청하여 천만명 이상의 무고한 국민이 회생되었다. 이 문화혁명으로 중국은 10년 이상 발전이 후퇴되었고, 막대한 사회적 · 경제적 손실이 발생했다. 현실을 무시한 토지개혁과 문화혁명, 이 두가지 운 동은 1976년 모택동의 사망으로 일단락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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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모택동(왼쪽)과 등소평 


 

등소평시대(1977년~1997년) 

등소평(鄧小平, 덩샤오핑)은 중국 공산당의 핵심인물로 50대에 당 최고지도부 일원이 되었다가 문화혁명 당시 주자파로 몰려 탄압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모택동이 사망하자 다시 정치에 복귀하여 1978년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공산당 이념을 바탕으로 한 시장경제의 원리를 적용하여 중국의 근대화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시발이 되었다. 즉 농민에게 경영의 자주권을 주어 생산 의욕을 갖게 하고, 공업의 다각적 경영으로 외국 자본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1980년 대외경제개발구역이라는 경제특구를 개발했다.  


그런데 이러한 개혁과 개방은 긍정적인 효과만 가져왔던 것은 아니다. 이로 인해 농촌 및 도시 연안지역과 서부지역간의 경제적 격차가 커졌고, 여기에 특히 관료들의 오직(汚職) 부패가 심해져서 차츰 공산당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그리고 그 불만은 1989년 천안문 사건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중국은 이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했고, 그 결과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혁개방정책을 계속 추진하여 큰 폭의 경제성장을 이루어 냈다. 


그런 공적을 남긴 등소평은 1997년에 사망했다. 그 후 중국은 강택민(江澤民, 장쩌민) 정권에 이어 2003년 후진타오(胡錦藩) 정권, 그리고 2012년에 현 시진핀(習近平)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들 세 정권은 모두 등소평 노선을 계승하여 개혁과 개방의 효과를 크게 거두게 되었다. 2002년 강택민은 그동안 제한했던 자본가의 공산당 입당을 가능하게 했고, 2007년 후진타오는 사유재산 보호를 위한 물권법을 재정하는 등 시장 개방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어 2008년에는 북경 국제올림픽을 개최하고, 2010년에는 상해에서 만국박람회를 개최하여 중국의 국위를 크게 선양한 바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중국은 환경문제, 인권문제, 부패, 그리고 지역간의 경제격차 등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런데다가 시진핑 주석은 집권 이후 과거 등소평이 지향했던  도광양회(光養眠, "칼빛[실력]을 감추고 때를 기다린다는 뜻) 전략을 중단하고 노골적인 대외팽창 정책을 밀고 있다. 대 2015년에는 남중국해의 암초를 매립하여인공섬을 조성 하고활주로와항만 시설을 건설했으며, 2016년에는 중국 군함이 일본의 센카쿠열도에 진입하여 영유권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2015년 미국의 케리 국무장관에게 “신형대국관계(新型 大國關係, 두 강대 국간의새로운 국제관계)’’ 를 제창하면서 태평양 지역을 미 · 중 양국이 협력하여 주도하자고 제의한 것은 기본적으로 패권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패권화 

중국은 이제 21세기의 모습을 확실하게 드러냈다. 국내적으로는 실로 많은 사회적 문제와 경제적 격차의 불안을 안고 있으면서도, 대외적으로는 중화의 의미를 살리면서 자기중심적 및 패권주의적인 자세를 과시하고, 군사면에서나 국제 정치 면에서 크게 팽창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취임연설에서 "중국은 평화적 발전을 지향하고 중화민국의 재홍을 추진한다고 하였다. 21세기 전반에 있어 아세아 · 태평양 지역의 안보 문제는 중국 의존재감증대와미 · 중양대국간 각축의 경화에 있다. 2012년 중국의 시진핑은 총서기에 선출된 직후 "중국몽(China dream, 위대한 중화의 부흥)” 을 선언했고,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America First"(미국 우선주의)를 주장했다. 미 · 중 간에 패권 다툼이 에스컬레이트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중국은 ‘‘신시대(新時代)” 에 돌입해 있다고 말한다. “신시대란 2017년 제 19차 공산당대회에서 시진핑이 공산당 총서기, 군사회의 주석, 그리고 국가 주석一등 세가지 권력을 장악한 일강( 强) 체제를 확립하고 임기제까지 폐지하여 글로벌 강대국을 만들기로 한 것을 말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모택동의 혁명전쟁으로 건국하였고, 등소평의 개혁개방으로 경제발전을 하였다고 본다면 시진핑은 장기집권을 통해 중국을 강성대국으로 발전시키는 정책을 펴고 있다.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자국의 패권에 의한 국제질서의 형성과 세계평화 확립, 즉 중국에 의한 세계평화를 확립하고자 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이 패권전략에 따라 중국 은 군사력을 더 한층 강화하는 패권화에 전진할것으로 본다. 


우리의 대응 

중국은 부강전략에 의한 경제발전으로 GNP는 세계 2위, 무역량은 세계 1위, 외화보유고는 3조 달러 이상에 달하는 경제 대국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시진핑 주석이 9천만의 공산당원과 당군(黨軍), 정부 등 3권을 징악한 일강체제가 확립 되고 임기제마저 폐지되어 명실공히 종신적 국가 주석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미 · 중 두 강대국 중에 택일을 해야 한다면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다. 이 경우 우리는 안보를 위해서는 미국을, 경제를 위해서는 중국을 택해야 한다. 하지만 6.25 전쟁을 뼈저리게 겪었던 우리로서는 경제보다 안보를 절대 우선으로 하지 않을 수 없다. 6.25 때 중국은 수십만명의 중공군을 파견하여 북한을 지원했고, 이로 인하여 우리나라는 막대한 인명 피해와 함께 당시 화폐가치로 70억 달러 이상의 물적 피해도 입었다. 이 금액은 일제가 35년간 한국에 투자한 생산시설과 사회간접자본, 그리고 민족자본에 의해 투자된 시설 및 부동산 등 손실규모의 약 2배 이상이다. 


조선 선조시대의 임진왜란은 국익을 무시한 당파싸움의 결과였다. 즉 경직된 문치관료의 국가체제, 중화사상에 의한 화이질서(華夷秩序, 중국이 주도하는 국제관계)의 세계관, 그리고 대국에 의지하려는 사대주의와 유교국가를 수호하려는 외국 배척사상 등이 우리나라를 망국에 이르게 하였다. 

우리는 현재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의 대응책은 첫째 자립방위체제를 확립해야 하고, 둘째는 동맹 관계와 전략적 호혜관계를 재검토, 재확인을 해야 하며, 셋째는 국제 정세를 엄밀하게 분석하고 파악해서 강 대국들의 Power Politic(무력외교)를 제대로 인식해야 하고, 넷째 사태변화에 대해 유연하게 대응하는 지혜와 행동이 용기있게 뒤따라야만 한다.


국력없는 외교는 헛되고, 국민에 대한 기만이며 사기이다 중국이 미국을 대체하려면 세계질서를 형성할 국제적인 위신과 신뢰감을 갖는 외교력과 군사력을 가져야 한다 특히 국제사회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관이 제시되어야만 한다. 더욱이 오늘날 모든 가치기준을 애국이냐 매국이냐의 논리로 접근하고, 우리 후세들에게 중국의 사회주의적 이념을 교육시키고 있다면 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공산주의가 아무리 훌륭한 이상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개인적인 본능과 욕망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평등하게 해야 한다는 논리의 어리석음은 이미 세계 역사가 입증하고 있다.

로버트배로 하바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일찍이 "국력은 GNP로 표시되는 경제규모가 아니라 일인당 GDP로 표시되는 국민의 삶의 질과 더 밀접하다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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